클라이언트나 상사의 요구가 아닌
오로지 나의 내면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작가를 꿈꿨고, 언젠가는 전시를 열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아크릴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재료의 질감이 손끝에 남는 느낌,
느릿한 호흡으로 쌓아 올리는 물성이 좋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수업이 중단되었고,
지금은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 드로잉을 이어하고 있다.
집이라는 공간의 제약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디지털 드로잉이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의 손맛을 동경한다.
그럼에도 함께 그린다는 감각이 좋아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했다.
시행착오 끝에 펜촉과 필름을 바꾸며
디지털에서도 나만의 질감을 찾아갔고,
무엇보다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점이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다.
특히, 어머니의 병실을 지키며 출퇴근하던 시기,
왕복 네 시간의 길 위에서
태블릿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였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마음이 가라앉았고,
소모되는 시간을 스스로 장악할 수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완벽주의'는 매번 발목을 잡았다.
디지털 환경에서도 작업 하나를 끝내는 것은 고역이었다.
기획에만 하루를 쏟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업로드하지 않고 수정만 반복했다.
그러다 우연히 '세계문학전집 일력' 앱을 만났다.
매일 정해진 문장이 주어진다는
단순한 구조가 장점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2026년 일력 드로잉을 시작한 지
오늘로 7일째다.
다시 기획의 늪에 빠지려 할 때면
AI에게 키워드를 제안받으며
스스로를 밀어붙인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성'이 아니라 '완료'하는 연습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빼어난 결과물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끝까지 마침표를 찍는 감각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1월 7일 새벽부터 완료한
일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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