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환영받을 만하지만
10여 년 전, 매해 들르던 디자인 페어는 나에게 기대와 배움의 자리였다. 사용자 중심의 혁신적인 제품과 다층적인 기획이 공존하던 그곳은, 디자이너로서의 나에게 자극이 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부스 대부분이 '눈코입 달린 캐릭터 굿즈'와 귀여운 스티커들로 채워졌다. "이게 디자인이야?" 당혹감이 먼저 들었고, 그 안에서 나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감정은 단순히 특정 장르나 작가에 대한 반감이 아니었다. 디자인 본연의 목적이 흐려지는 현실과, 그런 흐름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애정하던 장르가 변질되는 것을 지켜보는 감정, 동시에 그 안에 자리하지 못하는 소외감. 그리고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을 보며, 그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사전예매는 빠르게 매진되었고, 현장 티켓은 아예 없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온라인에는 도서전의 흥행을 반기는 목소리와 동시에, 굿즈와 인증샷을 위한 열기 아니냐는 냉소도 함께 존재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이제 3개월 된 사람으로서 이 열기의 방향이 궁금해졌다. 정말 책의 시대가 돌아온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책은 '소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걸까?
'책'을 중심으로 한 양면성
도서전의 흥행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책이 정적인 취미를 넘어,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경험으로 변모했다는 건 긍정적이다. 책을 둘러싼 활동적인 장들이 많아진다면 독서가 한층 자연스럽고 친근한 문화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열기 속에서 생기는 간극도 있다. 출판 시장은 여전히 고전하고 있고, 독서율은 낮아지고 있다. 그런 현실과 무관하게 도서전만은 '북적이는 공간'이 되었다. 물론 인증샷을 찍고, 굿즈를 구매하며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접점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책 자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본질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디자인 페어가 그랬듯, 도서전도 본질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라면, 책 자체의 깊이를 만날 수 있는 공간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현장 티켓을 전면 폐지한 운영 방식은 디지털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불리하게 작용했고, 강연 예약과 입장권이 분리된 시스템 역시 많은 혼란을 낳았다. 모두를 위한 책 축제라면 접근성에서부터 더 포용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독립출판 부스를 강화하거나, 온라인 강연 스트리밍을 도입하는 방법도 있다. 책을 핑계로 왔다 해도 괜찮다. 다만 그 자리가 누군가에겐 책의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나는 아직 출판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도, 책을 깊이 파고든 독서광도 아니다. 하지만 책이 내게 준 위로는 명확하다. 문장 하나가 하루를 바꾼 적이 있었고, 그 경험이 지금의 글쓰기를 이어가게 만들었다.
디자인 페어에서 캐릭터 굿즈를 팔던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시장과 대중의 감각을 읽고, 흐름에 올라탄 그들은 유연하고 빠르다. 도서전의 출판사들도 새로운 전략으로 독자와 연결되려 애쓰고 있다. 그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나는 다만, 책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책을 핑계로 모인 우리가, 결국 책 자체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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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5 - [도망자의 서재] - 서울국제도서전 2025 : 믿을 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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