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만 쌓인 굼뜬 신입
N년차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새로운 사이드 프로젝트 앞에서 나는 다시 ‘손이 느린 신입’이 되었다.
슬로건 하나 쓰겠다고 노트북을 2시간 동안 쳐다봤다.
마케팅 문구를 쓰는 게 아니라, 유언장이라도 쓰는 기세였다.
'최선의 길'을 찾겠다고 머리를 굴리다가,
'자의식의 늪'에 빠져 며칠을 허우적댔다.
효율을 좇다 보니, 비효율의 표본이 되어 있었다.
그때 유튜브가 내게 하나 던져줬다.
제목은 ‘똑똑한 사람일수록 게으른 이유’.
운명 같은 알고리즘에 감탄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멘트들에 숨이 턱 막혔다.
이 영상이, 멈춰 있던 실행 회로 하나를 톡 건드렸다.
“손이 느리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 착수 전 망설이는 CEO형 : 더 나은 방법, 완벽한 설계를 찾다가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
- 실행 후 집착하는 예술가형 : 시작은 잘하지만, 결과물에 집착해 끝없이 고치는 사람.
나는 이 두 캐릭터의 콜라보다.
SNS 콘텐츠 쓰려다 해시태그만 3시간 골랐고,
겨우 쓴 초안은 10번 고쳐도 맘에 안 들었다.
그동안은 기획을 건너뛰고 “그냥 해보자”로 돌파했지만,
새로운 분야에서는 그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몸과 마음이 다시 초심자가 된 듯, 모든 게 낯설었다.
작은 실행으로 쌓은 자신감
이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균형을 잡아.”
콘텐츠가 완벽한지 고민하던 내가,
'게시물 하나 업로드'를 목표로 삼았다.
초안이 쓰레기 같아도, ‘업로드 눌렀다!’라며 스스로 손뼉 쳐주기로.
작은 실행, 짧은 시도, 자주 움직이기.
완벽주의가 끼어들기 전에 손을 얹고 빠져나온다.
그 영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은 이랬다:
“실행이 쌓일수록 지수 단위로 무거워진다.”
작업이 밀리면, 단순한 할 일 하나가 아니라 정서까지 무너진다.
우리의 뇌는 네 자릿수 암산도 버거워하는 유약한 존재다.
생각을 덜고, 손을 더 움직여야 한다.
손으로 다시 쓰는 리듬
나는 똑똑함을 내면에만 몰아넣은,
찌그러진 계란 같은 사람이다.
내면은 충분히 채웠다.
이제는 외부로, 행동으로 힘을 흘려보낼 때다.
이 글도 엉성한 초안이다.
하지만 저장 버튼을 누른 내 손은 지금 으쓱대고 있다.
“봐, 나 움직였지?” 하고.
손을 움직이며, 나는 다시 리듬을 찾아가고 있다.
Image by. Music rhymes pl5 (1927)
📍원본 영상이 궁금하다면, <똑똑한 사람일수록 게으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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