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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클래식/작은 고백

굿바이 대신 'see you'

by 작은 도망 2025. 4. 24.

사진: Unsplash 의 Lavi Perchik

"10년 가까이 갈망하던 드로잉, 이제야 시간이 생겼는데 재미가 없어졌다."

 육아 4년 차.
회사도 무사히 정리했고, 아이도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다.
드디어,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이 생겼다.
몇 가지 주제를 정하고, 레퍼런스를 모아 드로잉을 시작했다.
딱 3일쯤 지났을까.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재미가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는 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왔으니까.
이 시간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봤다.
내가 디자이너로서 즐겁게 일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그건 ‘창작’이라기보다는 제한 속에서의 기획과 도출이었다.
정해진 글자 수, 필수 소재, 금지된 워딩들.
그 틀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방향을 찾아야 했다.
놀랍게도, 그게 훨씬 더 창의적인 일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아무 제약도 없다.
정해진 예산도 없고, 요구사항도 없고, 수정을 지시하는 클라이언트도 없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그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를 멈추게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그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향해 나아가던 몰입의 시간과,
그 속의 나 자신이었는지도.

9시간을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
선 하나, 질감 하나에 집요하게 파고들던 그 몰입이 좋았던 거다.
창작이 아니라, 집중과 과정에 더 가까웠던 즐거움.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또 하나의 감각이 스쳤다.
나는 기획이 있는 표현,
무언가를 이해하고 구조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 큰 안정감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그림체’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질문’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이 혼란이 조금 덜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늘 '그림'과 관련된 미래만을 상상해 왔는데,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을 수 있겠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뭘까?”
이 질문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