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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클래식/작은 고백

사랑아, 나이에 맞는 얼굴로 와줘 (윽)

by 작은 도망 2025. 5. 1.

사진: Unsplash 의 bennett tobias

연애 12년, 결혼 4년 차.
나는 곰 같은 사람과 결혼했다.
곰 그 자체이거나, 곰인 척하는 여우이거나.
(정확히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니, 15년을 같이 지냈는데도 모르겠다는 건… 나도 곰일 가능성이 있다.)

남편은 나와 정반대다.
파악이 안 된다. 감정 표현도 적다.
사실 나는 그런 타입을 예전엔 진심으로 기피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을, 애인으로 그리고 남편으로 골랐다.
모두가 그랬듯이 내 남편도 연애 초창기에는 사랑꾼이었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남편은 네 마음 바로 알아채는 타입이야? 아니면 네가 말해도 잘 모르는 타입?”
그럴 때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3번도 만들어줄래? 내가 (여러 번) 말해도 모르는 사람(^^)

연애 시절에도, 신혼 초에도 이건 자주 다툼의 불씨였다.
내가 이만큼 말했는데, 아직도 몰라?

근데 희한하게도
그 '무딤' 덕분에 지금은 숨이 좀 트인다.
만약 그가 내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늘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숨 막혀했을 것이다.
나조차 눈치 보며 살았을지 모른다.—진짜 피곤했을 거다.

아빠로선 100점인 내 남편은, 남편으로선 가끔 빵점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냐고?
아니,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단지 얼굴이 바뀌었을 뿐.

설레고, 질투하고, 안절부절 못하던 15년을 지나
이제는 조금 더 안정적이고, 차분한 사랑이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배려하고, 그가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길 바라고,
같은 방향은 못 보지만 적어도 같은 팀을 맡고 있는,
전우애 비슷한 그 무엇이다.

이제는 '누가 더 많이 사랑하나'보다
'누가 더 지치지 않았나'를 살피게 되는, 서로를 응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의 다른 얼굴을 보고 있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아이를 다 키우고, 다시 둘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결혼 전처럼, 우리는 또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될지 모른다.
그땐 또 다른 얼굴의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기혼자라면 누구나 깨닫지 않았을까.
사랑은 아마도, 늘 같은 감정이 아니라,
그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로 찾아오는 감정
일 것이다.

나는 아직 그 모든 얼굴을 다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마주하게 될 그 얼굴이
너무 낯설지 않기를,
그리고 그 곁에 여전히 우리가 함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