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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클래식/도망자의 서재

[인문학] I. 공부하는 노동자 | 라틴어 수업, 한동일

by 작은 도망 2025. 5. 9.

사진: Unsplash 의 Ben White

2017년에 출간된 이 책은, 명저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
단순한 지식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챕터마다 곱씹을 구절이 많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리뷰 역시, 그 멈춤에서 시작된다.

한동일 작가님은 ‘아지랑이’, ‘네뷸라(nebula)’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시는 것 같다.
그의 책과 인터뷰 곳곳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이 단어들은 결국 같은 메시지를 향하고 있다.

"우리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아, 이글거리는 투명한 불꽃을 발견하라.
공부하고 살아간다는 건,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찾아보는 일이다."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다.”

작가는 단순한 수사를 넘어, 이 문장을 진심으로 말한다.
머리로만 하는 공부는 반짝 끝나지만,
몸이 기억하는 공부는 리듬이 되고, 패턴이 되고, 결국 삶이 된다.

지식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축적되는 것이다.
'노동’으로 지식을 쌓는다는 건
천천히, 자기만의 리듬으로, 반복 가능한 삶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책의 서문에서 언급되는 ‘아지랑이’는,
아마도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일지 모른다.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다시 마음속 아지랑이를 들여다봐야 한다.

어떤 지식을 쌓고 싶은가.
누구를 위해 쌓고 싶은가.
그 지식을 쌓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또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든다. 공부는 정말 우리를 바꾸는 걸까?

공부를 많이 했다는데 여전히 가벼운 사람들이 있고,
책을 수십 권 냈다는데도 여전히 말끝마다 날이 서는 사람도 있다.
국회를 보면 알 수 있다.
지식은 말의 볼륨을 키우지, 품격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공부는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어떤 공부를 선택하는지,
지식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어떤지,
반복과 실패를 견디는 방식은 무엇인지—
그 모든 과정이 결국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든다.


나도 그런 착각 속에 '토익'을 준비한 적이 있다.
도태되기 싫어서, 모두가 하니까.
지식과 스펙이 쌓일 거란 기대로 시작했지만,
결국 남은건
말끔하게 비워진 머리와 가슴, 그리고 잔고였다.

드러난 자신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
그 자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공부의 진짜 기능을 체화할 수 있다.

공부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고, 삶을 반복할 힘이기도 하다.

“나를 가장 드러나게 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그리고, 그때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책장을 펼치고, 나의 리듬을 묻는다.
공부는 여전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