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9 - [도망자의 서재] - I. 공부는 했지만, 사람은 그대로입니다만? | 『라틴어 수업』 한동일
“인간의 부조리함은 뇌가 아니라 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부조리함을 해결하기 위해 위가 아니라 뇌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위는 얼마나 많은 일을 저질러왔고, 내 뇌는 그걸 얼마나 성실히 수습해 왔을까.
이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단지 수습반장일 뿐이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사고를
빠른 직관형 시스템 1과 느린 분석형 시스템 2로 나눈다.
우리는 늘 시스템 2, 즉 ‘이성’에 의지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시스템 1—무의식, 감정, 위의 소리 따위—에 움직인다는 점이다.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에서도 말한다.
결정은 뇌가 아닌 감정 기반 기억에 따라 내려지며,
이성은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그렇다. 기억조차 감정의 흔적을 따라 저장되고, 판단은 그 감정의 편향을 따라 흐른다.
바로, 어제 시스템 1의 사고가 있었다.
긴 연휴 동안 무장해제된 나의 위장을 다시 단속하겠노라 다짐한 하루.
조금 더 움직이고, 조금 덜 먹으며 ‘건강한 나’의 환상에 도달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여느 때처럼 아이를 재우고 조용히 노트북 앞에 앉았고,
눈앞에 남편의 치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치킨 하나를 뺏어먹었다.
짜릿했다.
야채수프 뒤에 이어지는 기름진 ‘치킨’의 맛은
이성이 손 쓸 수 없는 찰나를 안겨주었다.
”오늘 덜 먹었잖아, 내일 더 움직이면 돼.”
수습반장인 나의 뇌는 그럴싸한 해결책을 내놓는데 정말 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 날의 나에게 모든 걸 넘긴다.
우리의 많은 선택은 사실 ‘선택’이 아니라 ‘사건’에 가깝다.
그 사건은 내 감정에서 시작되고,
나에게서 벌어진다.
뇌는 단지 뒤늦게 명분을 붙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전담 법무팀’이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사고를 칠 것이고
각자의 뇌는 멋지게 수습할 것이다.
이걸 인지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판단도,
내 판단도
조금은 덜 오만하게, 덜 확신하며 바라보게 된다.
이번 썸네일엔 의미가 있어서 설명을 덧붙인다.
대표이미지는 Achille Lemot의 풍자 석판화 시리즈
『Pilori-Phrenologie』 중 'No. 4, 나폴레옹 3세'이다.
결정의 대부분이 이성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포장하는 데 있어선 탁월했던 대표적인 역사 인물이다.
그의 두개골에 쓰인 단어들은 단지 풍자가 아니라,
오늘의 나를 보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 ‘2X’, ‘SEDAN’, ‘STRASBOURG’, ‘MEXICO’ 등: 그의 치명적인 정치·군사적 판단 실수들을 상징한다.
(특히 SEDAN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대패를 의미)
• ‘LUXURE(사치)’, ‘PARESSE(게으름)’, ‘PROSTITUTION’: 개인적 도덕성/권력남용에 대한 조롱
• ‘ABRUTISSEMENT’(어리석음), ‘JESUITISME’(권모술수적 교활함): 판단력 결여, 종교·권력 결탁을 풍자
• 피 흘리는 관자놀이와 목: 그의 정치가 가져온 희생과 폭력성을 시각적으로 강조
• 그림 하단의 시구는 그를 “국가를 해친 자”, “가면을 쓴 인간”이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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