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든 선택 속의 나는, 여전히 나인가?
“고백할까, 말까?”
“지금 이거 사도 되는 걸까?”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묻는다.
AI가 내린 선택을 따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나’일까?
AI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전히 너야. 하지만 그 ‘너’는 더 이상 완전히 네가 만든 게 아닐 수도 있어.”
왜일까? AI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답’을 준다.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 어울릴 직업, 심지어 감정까지 분석해 말해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다.
왜 좋아하는지, 왜 원하게 되었는지, 어떤 맥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걸 내가 해석하지 않고 AI의 결괏값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내 이야기는 AI가 설계한 맥락 속으로 녹아든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따르고 있는’ 삶.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AI가 제시한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결국 내가 한 선택이다.
그 순간 ‘이걸 따를지 말지’를 고민했다면, 그건 여전히 ‘내가 만든 선택’이다.
"AI는 도구이고, 나는 주체다.
그 주도권을 느끼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나’다."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선택은 단순히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서 빛난다.
AI는 통계와 확률로 최적의 조합을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감정과 기억, 직관을 덧칠한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건 나다운가?”
그리고 그 물음은 AI가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는 내가 내린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설명은 엉성해도 된다.
중요한 건 설명하려는 태도,
즉 ‘나’의 언어로 그 선택을 살아내려는 자세다.
효율과 혼란 사이, 나는 어떻게 선택할까?
AI는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준다.
때로는 너무 정확해서, 그 말이 ‘정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효율만으로는 인간을 완성시킬 수 없다.
우리는 비효율과 혼란, 애매함과 감정의 진폭 속에서 자율성을 만든다.
같은 선택에도, 태도는 다르고 결과는 다르다.
그걸 알면서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살아내는 것 —그게 인간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AI가 만든 선택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나’ 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젠가 ‘설계된 사용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가?”
“내가 선택한 이 삶을, 내가 살아내고 있는가?”
오늘도 우리는 묻고, 선택하고, 때로는 망설이며 살아간다.
그 망설임 속에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Image by. The Water Lily Pond, c. 1917-19. Claude Monet (French, 184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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