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인간인가요?”
너무 당연한 질문이다. 동시에, 곧 우리의 신분증이 될 질문이기도 하다.
지문을 대고, 홍채를 들이밀며 “저 사람 맞아요”라고 말해야 하는 시대.
누가 상 줘서 받는 것도 아닌데, 인간 인증 마크를 붙이고 살아야 한다니—
이쯤 되면 유머도, 진담도 다 될 이야기다.
1. AI가 인간보다 더 설득적이다?
얼마 전, 스위스 취리히 대학 연구진이 ‘레딧(Reddit)’ 커뮤니티에서 조용히 실험을 하나 진행했다.
주제는 이것이었다. AI는 사람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는가?
결과는 놀라웠다.
AI는 인간보다 최대 600% 더 설득력이 있었다.
AI는 사용자의 관심사와 도덕적 가치, 글쓰기 습관을 정밀 분석했다.
그리고 가짜 페르소나를 만들어, 인간처럼 말하고 공감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이 실험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AI는 이제 단지 똑똑한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설득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동시에, 샘 알트먼이 공동 설립한 '월드 재단(Worldcoin Foundation)'은
오비(Orb) 시스템이라는 걸 공개했다.
이 장치는 홍채를 스캔해 ‘당신이 인간임’을 증명한다.
AI가 너무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인간은 ‘진짜 인간’이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는 논리다.
일터에선 AI와 나란히 일하면서,
커뮤니티에선 ‘신뢰’라는 명분으로 사람만 받겠다고 한다.
웃어야 할지, 씁쓸해해야 할지 모를 풍경이다.
2. 인간 인증: 새로운 위계의 시작
오비 시스템은 홍채 정보를 저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쟁점은 따로 있다.
‘인간 인증’의 권한이 사립 재단에 있다는 사실.
사립 재단의 일원이 권한을 남용한다면?
혹은 단순한 시스템 오류로 누군가의 인증 마크가 사라진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봇’으로 간주되고, 커뮤니티에서 쫓겨나며,
점차 디지털 세계의 시민권 자체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점점 타인의 서버에 저장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인증이 단지 커뮤니티 출입증이 아니라, 기본소득의 지급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월드 재단은 실제로 인증된 사용자에게 암호화폐를 나눠주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즉, 경제적 생존권마저 인증 마크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이 시스템은 정말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일까?
오비는 홍채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 중에는 홍채 인식이 어려운 이들이 있다.
디지털 접근성이 낮은 고령층, 장비를 갖추기 어려운 저소득 국가,
감시를 피해 살아가는 난민이나 탈북민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말 아래,
점점 더 많은 인간이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인증 마크를 사랑한 인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원래 마크에 진심이었다.
SNS의 블루 마크, 브랜드의 정품 인증 배지,
그리고 이제는, 인간 마크까지.
마크는 신뢰를 증명한다는 명분 아래,
구별을 가능케 하고, 위계를 만든다.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장치는
그저 인간을 구분하는 ‘도구’ 일뿐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신분제인가?
다음 편에선, AI와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면
우리의 관계와 커뮤니티는 어떻게 재편될지에 대해 써보려 한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 다움’을 증명하고 있나요?
마크 없이도,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Image by. Book of nonsense Pl.15 (1850-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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