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랜스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친구의 독보적인 필살기는 몸을 둥글게 말아 적에게 돌진하는 것.
그 하찮은 ‘돌진’은 느린 속도와 초라한 위력 탓에 패배를 면치 못한다.
영화를 아직 만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살짝 풀어보자면,
랜스는 픽사 영화 <인사이드아웃 2>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주인공 라일리가 몰래 사랑했던 게임 속 영웅이지만,
자신의 보잘것없는 공격력에 늘 주눅 들어 있다.
그 순간, 까칠이가 다가와 랜스를 힘껏 북돋운다.
“그럼 저주를 재능으로 승화해야지.”
나는 겁쟁이다.
블로그 이름도 ‘도망자의 노트’라 부를 만큼.
그런데 도대체 왜일까?
안정적이고 익숙한 내 직업을 내던지고,
심장이 쿵쾅대는 이 낯선 길로 뛰어든 걸까?
돌아보면, 나는 무모할 정도로 자주 방향을 틀었다.
이공계 연구자가 꿈이었던 나는 미대에 진학했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모은 돈으로 미술학원에 등록해 편입에 성공했다.
그 이후에도 직무 전환을 위해 다양한 스터디에 참여했다.
그렇게 헤매며 내가 얻은 건
무엇이 내 길이 아닌지를 알게 된 확신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통찰이 있었던 건 아니다.
도전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 운이 좋게도, 문장 하나가 다가온다.
“헤맨 만큼 내 땅이다.”
내가 헤매고 도망다니던 길들이
부끄럽지 않은 지도가 되어준다.
다시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이정표를 세워준다.
두려움과 불안은 늘
‘모르는 상태로 멈춰 있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움직였다.
도망치듯, 굴러다니며, 내 땅을 넓혔다.
그 겁이라는 저주는
천천히, 내 방식대로
재능이 되어가고 있다.
랜스의 필살기처럼.
영화 속 수많은 장면에서 눈물을 삼켰지만,
마지막으로 이 순간을 소개하고 싶다.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의 기억들이
자아를 형성하며 목소리를 낸다.
난 이기적이야.
난 친절해.
난 부족해.
난 좋은 사람이야.
난 약해,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라일리의 감정들이
그 혼란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어제의 나는 두려움에 무너졌고,
오늘의 나는 나를 안아주었다.
혼란과 포옹이 반복될 거라는 걸 안다.
앞으로도 나는 쉽게 담담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렇게 예민한 나를 데리고
나는 내일을 기다린다.
오늘이 너무 무서워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날도 있고,
내일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날도 있다.
그리고 어떤 내일은
회복도, 성장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더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내일도 살아낼 것이다.
Image by. Map of Ancient Rome Illustrating Major Monuments and the Seven Hills (before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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