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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클래식/작은 고백

반가움, 아이와 다시 배우는 마음의 언어

by 작은 도망 2025. 8. 9.

인사하는 학생들, 중학생, 교복입은 학생, 학창시절
Image by SORA

“안녕하세요!”라는 말,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진심으로 건네고 있을까?
네 살배기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의 습관들이 하나둘 새롭게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인사’라는 단순한 행위가 내게 던진 질문은 예상치 못한 깊이로 나를 이끌었다.

“안녕~ 해야지!” 내가 아이에게 웃으며 말하면,
아이는 작은 몸을 꼬며 속삭인다. “부끄러워서 안 돼…”
아빠나 선생님께는 수줍게 인사를 건네지만,
낯선 이 앞에서는 눈길조차 피한다. 처음엔 그저 낯을 가리는 성격이겠거니 했다.
“인사는 예의야”라고 부드럽게, 때론 단호하게 가르치며.
그러다 우연히 오은영 박사의 한마디가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인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반가움’을 느끼게 해 주세요.
인사는 반가운 마음이 생기면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그 말은 내 안의 오래된 틀을 흔들었다.
내가 배운 인사는 반가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른을 보면 인사해야지”라는 말은 의무였고,
예의라는 이름 아래 기계적으로 내면화된 규칙이었다.


문득 떠올려본다.
내가 진심으로 반가워서 건넨 인사는 몇 번이나 될까?
사람을 만나며 마음이 먼저 움직였던 순간은 얼마나 드물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사람을 ‘좋아하기’가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개별적인 사람보다는 ‘인류’라는 큰 그림이 더 편안했다.
사람 한 명 한 명은 예측 불가능하고, 감정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류는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 사회의 패턴, 군중의 흐름을 읽는 일이 더 익숙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대신, 인류에 호기심이 많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좋은 작가가 되기엔 한계로 다가왔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일은
결국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마주하는 과정이니까.

고민하던 중, 한 통계를 발견했다.

‘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생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은 외모도, 유머도 아닌, “좋아하는 사람의 리스트가 긴 사람”이었다.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이들이 결국 사랑받는 사람들이었다.
그 통계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좋은 작가, 좋은 이야기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들은
결국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애정이 있기에 관찰이 깊어지고,
관찰이 깊어지면 공감이 싹트고,
공감이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반대로,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한 사람을 오래,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애정이 생겨나지 않을까?
‘인류’라는 큰 그림만 바라보던 나도, 한 사람의 작은 얼굴을 마주하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발견한다면, 반가움이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아이와 함께하는 날들은 이 가능성을 조심스레 실험하는 시간이다.
아이는 감정을 순수하게 살아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환한 미소로 다가간다.
하지만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조용히 물러선다.
그건 무례함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순서를 지키는 솔직한 방식이었다.

이제 나는 아이에게 “안녕~ 해야지”라고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내가 먼저 사람을 만나며 반가운 미소를 짓는 연습을 한다.
내가 진심으로 반갑지 않은데, 아이에게 예의만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깨달았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 반가움의 감정이야말로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라는 걸.
사람에게, 순간에게, 삶의 한 장면에게
“와, 너구나!” 하고 진심으로 반길 때,
그다음 문장은 저절로 흘러나온다.

이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 나는 예의가 아닌 마음을 먼저 떠올리려 한다.
외워둔 인사가 아닌, 진짜 반가움으로.
어쩌면 그건, ‘인류’라는 안전한 거리에서 사람을 바라보던 나를,
다시 사람의 품으로 데려오는 가장 따뜻한 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