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의 승리는 어쩌면 인간이 AI에게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잠깐 멈춰 섰다.
너무 멋있고, 너무 쓸쓸한 말이었다.
AI와 비교당하지 않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
왜 우리는 이토록 '이기고 싶어'할까?
이기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부족한 자원을 두고 싸우던 원시시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앞서야 했던 시절.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서고 있는 ‘상대’는 옆집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기술이다.
AI가 내 일자리를 대체할까?
내가 쓴 글이 AI보다 덜 읽히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이런 질문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다.
'내가 존재할 이유'를 묻는 실존적 불안이다.
이겨야 한다는 강박, 그 너머의 인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기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 유산이다.
과거의 인간은 생존을 위해 경쟁했고,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고,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강한 자’가 되어야 했다.
물론 우리는 더 이상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는 사회에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떨어져야 내가 붙는 취업 시장,
누군가의 돈이 빠져야 내 수익이 늘어나는 자본 시장,
우리가 살아가는 구조에는 여전히 은밀한 경쟁이 흐르고 있다.
경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그 이름과 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 시대에, ‘이겨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점점 더 절박해진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물러선다.
나는 이기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실험 중이다.
이기는 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로 걸어가며,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지금 내가 선택한 존재 방식이다.
AI 시대, 인간이 계속해야 할 일
전화기, 인터넷, SNS가 그래왔듯이.
지금 우리는 누군가를 ‘챗봇’에게 위로받게 하고,
이별을 알람처럼 통보하고, 감정을 이모지로 전달하는 시대를 산다.
우리는 더 이상 이기기 위해 달릴 필요는 없다.
대신,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만들고,
불완전함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의 판단 또는 선택까지 결정하도록 허락할 필요는 없다.
기술은 나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내가 살아갈 이유를 대신 말해줄 수는 없다.
인간이 계속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 질문하기 : 결과만 믿지 않고, 그 너머의 맥락과 윤리를 묻는 것.
- 연결하기 : 기술이 분리한 사람들 사이를, 공감과 대화로 다시 잇는 것.
- 존재하기 : 완벽하지 않아도, 느려도,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다.
AI보다 느린 한 사람일지라도,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사람들과 함께.
Image by. It’s time for the people who talk about pollution to join the people who are doing something about it - Charles Saxon (American, 1920-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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