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구석 세 번째 시리즈에서는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향'이다.
어떤 냄새는 순간을 붙잡아둔다.
어떤 향은 기억보다 마음을 먼저 흔든다.
그래서 너에게 '향'은 단순한 취향보단
'타임라인' 같은 것이다.
1. 관계 속의 냄새
동생과 나는 이제 따로 살지만
서로 마주칠 때면, 이상하게도 예전 '우리 집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 냄새는 곧장 어렸을 적 집으로 데려간다.
아직 젊었던 부모님의 모습,
둘러앉은 거실, 촌스러운 체리색 몰딩이 따라온다.
남편은 연애 때부터 '디올의 Sauvage'를 즐겨 뿌렸다.
그때는 너무 강하다며 '향수로 샤워했냐'는 핀잔을 줬지만,
이젠 그 향이 곧 '그 사람'이 되었다.
출산과 함께 우리의 향수는 잠깐 멈췄지만
'Sauvage'향을 맡으면 연애 시절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10년도 더 된 귀여운 이야기 하나.
중학생 시절, 내 냄새가 너무 좋았던 남편이
우리 집 섬유유연제를 따라 샀단다.
비슷한 향이 나는 친구 옆자리로 자리도 옮긴 적도 있다며.
그 말을 듣던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서른이 넘은 지금, 뭉클하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향이 '사람을 남긴다'는 걸 처음 느낀 건.
2. 향이 사라진 시간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향은 내 일상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작고 여린 호흡기 앞에서 나는 조심스러워졌고,
향수는 물론 디퓨저, 향초 모두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섬유유연제를 고를 때도, 향보다 성분표가 먼저였다.
무언가를 맡는다는 건 호흡을 허락하는 일이라는 걸,
아이를 통해 다시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내 몸과 공간에서는
‘향’이라는 감각이 숨죽인 채 지나갔다.
3. 돌아오는 공기
이제 아이는 4살이 되었다.
여전히 주의할 향료는 많지만,
조금씩 우리에게 숨 쉴 틈을 허락하고 싶다.
성분이 안전한 핸드크림이나, 회사에서 쓰는 로션 정도로.
잠깐 기분을 바꾸는 ‘작은 공기’를 다시 들이고 싶어진다.
얼마 전엔 튤립향이 들어간 핸드크림을 바르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달콤하고 페미닌 한 향에 마음이 녹다니.
예전엔 초록초록하고 묵직한, 나무 같은 향만 좋아했는데.
이런 변화가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나는 여전히 향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민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괜찮다.
날마다 다른 향을 고를 수 있다는 건,
그날의 기분을 내 몸이 먼저 알아주는 일이니까.
향이란 결국, 내 감정의 작은 표정이다.
4. 유목민의 향 리스트
- 향수 01. 킬리안 프린세스
: 진저와 마시멜로가 섞인 스파이시 달콤.
다섯 가지 샘플 중에 제일 좋았던 향. 이름이 '프린세스..?',
나와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름이라 더 좋았다. - 향수 02. 누다라 오키탈
: 사과, 튤립, 초록 풀 내음이 가볍게 섞인 향.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향수에 튤립이 있어서인지, '튤립'향은 언제나 옳다. - 향수 03. 포맨트 BASIL TERRACE
: 싱그러운 유자 열매와 생기 넘치는 바질 잎이 주는 경쾌함.
저렴한 가격에 인위적이지 않은 향, 더군다나 '코튼' 라인이 다양하니 향 덕후라면 추천한다.
바질 테라스는 이국적인 향으로, 나의 첫 해외여행지를 떠올리게 한다. - 탬버린즈 펌키니 핸드크림
: 차조기잎과 코코넛밀크가 섞인 유니크한 조합.
어딘가 묘한데 기분 좋은 향. - 러시 바디워시 – 굿카마 & 그래스
: 굿카마는 따뜻하고 파촐리 한 에너지,
그래스는 이름 그대로 풀밭을 뛴 듯한 향.
어른이 되면 꼭 그 날 기분에 따라 '바디 워시'를 고르고 싶었다. - 분코 섬유유연제
: 향보다는 성분이 우선.
은은하게 머물고, 비건 제품이라 온 가족이 함께 쓰기에 좋다.
향은 공기 중에 남지만,
어쩌면 우리 기억 속에는 더 오래, 더 깊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향 하나에 마음이 환기되는 날이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의 나를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그렇게 오늘도 나는,
내 안의 '믿는 구석' 하나를 더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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