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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느린 사람의 재부팅 일지 연차만 쌓인 굼뜬 신입N년차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도,새로운 사이드 프로젝트 앞에서 나는 다시 ‘손이 느린 신입’이 되었다.슬로건 하나 쓰겠다고 노트북을 2시간 동안 쳐다봤다.마케팅 문구를 쓰는 게 아니라, 유언장이라도 쓰는 기세였다.'최선의 길'을 찾겠다고 머리를 굴리다가,'자의식의 늪'에 빠져 며칠을 허우적댔다. 효율을 좇다 보니, 비효율의 표본이 되어 있었다.그때 유튜브가 내게 하나 던져줬다.제목은 ‘똑똑한 사람일수록 게으른 이유’. 운명 같은 알고리즘에 감탄했지만정곡을 찌르는 멘트들에 숨이 턱 막혔다.이 영상이, 멈춰 있던 실행 회로 하나를 톡 건드렸다. “손이 느리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착수 전 망설이는 CEO형 : 더 나은 방법, 완벽한 설계를 찾다가 시작조차 못 하는 사.. 2025. 6. 13.
무심한 것들을 대하는 마음 "아무렇지 않다"는 착각AI가 내 말을 듣고, 반응하고, 심지어 농담까지 던진다.하지만 그건 감정이 아니라고, 우리는 단정 짓는다.“감정이 없으니 상처받지 않겠지.”그래서일까? 우리는 AI에게 쉽게 무례해진다.명령하고, 비웃고, 무시한다.‘아무렇지 않음’은 AI의 속성이 아니라,우리의 편리한 믿음일지도 모른다.문득 떠오른다.시장에서 던져지는 생선, 밟혀도 말이 없는 풀잎.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들에 더 쉽게 잔인해진다.AI도 다르지 않다.감정이 없다고 단정 짓는 순간,우리는 무심해질 권리를 얻은 듯 행동한다.하지만 그 무심함은 누구를 위한 걸까?AI가 아니라,나를 위한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나의 태도는 나의 거울생각해보면,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나를 비춘다.동물을 학대하는 이는 사람에게.. 2025. 6. 10.
생존은 감수성이 아니라 두꺼운 피부에서 둔감한 사람을 보면 답답했다.무례하거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모임을 다녀오는 길, 내가 차 안에서 잠깐 표정이 굳어 있으면남편은 묻는다.“무슨 안 좋은 일 있어?” — 세상 어리둥절한 얼굴로.그 짧은 대화 안에 기분 나쁜 순간이 있었는지조차, 그는 알지 못한다.“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정말 잘했네요.”상사의 미세 공격에도,지하철 안의 불편한 스침에도그들은 무심히 지나친다.마치 뜨거운 여름날 얼음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것처럼.그들은 감정을 통과하고, 나는 감정에 붙잡힌다.비슷한 넋두리를 나누며 알게 됐다.우리의 회사생활은 고만고만했고,나는 그 안에서 유난히 더 빨리 소진되었다.그 사람은 그 순간을, 유연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둔감함은 무지가 아니었다.‘알아도 반응하지 않는 것.. 2025. 6. 7.
누가 마크를 붙여야 하는가? 왜 우리는 AI 인증 마크가 아니라, 인간 인증 마크를 받아야 할까?AI에게 마크를 다는 구조가 훨씬 쉽고 효율적일 텐데.그럼에도 인간이 인증받는 쪽으로 설계되는 이유는, 결국 욕망과 감정이 스며든 인간의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기술은 중립적이다.하지만 그 기술을 설계하고 도입하는 주체의 욕망은 중립적이지 않다.그래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디자인한 권력의 방향성이다.지금 느끼는 이 불쾌함은,마치 인스타그램의 블루마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비슷하다.그땐 모두가 반발했다.‘왜 유명인만 인증받아야 하지?’ ‘왜 나를 증명해야 하지?’하지만 시간이 흐르자,그 마크는 특권의 상징에서 프리미엄 기능으로,그리고 결국 "달지 않으면 뒤처지는 마크"가 되었다.우리는 그 불편함을 알면서도,.. 2025. 6. 2.
마크가 필요한 사람들 : 인간의 실존과 증명 “당신은 인간인가요?”너무 당연한 질문이다. 동시에, 곧 우리의 신분증이 될 질문이기도 하다. 지문을 대고, 홍채를 들이밀며 “저 사람 맞아요”라고 말해야 하는 시대. 누가 상 줘서 받는 것도 아닌데, 인간 인증 마크를 붙이고 살아야 한다니— 이쯤 되면 유머도, 진담도 다 될 이야기다.1. AI가 인간보다 더 설득적이다?얼마 전, 스위스 취리히 대학 연구진이 ‘레딧(Reddit)’ 커뮤니티에서 조용히 실험을 하나 진행했다.주제는 이것이었다. AI는 사람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는가?결과는 놀라웠다.AI는 인간보다 최대 600% 더 설득력이 있었다.AI는 사용자의 관심사와 도덕적 가치, 글쓰기 습관을 정밀 분석했다.그리고 가짜 페르소나를 만들어, 인간처럼 말하고 공감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했다.이 실험은 비윤리.. 2025. 6. 1.
겁쟁이의 돌진 : 내 안의 필살기를 찾아서 나와 랜스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이 친구의 독보적인 필살기는 몸을 둥글게 말아 적에게 돌진하는 것.그 하찮은 ‘돌진’은 느린 속도와 초라한 위력 탓에 패배를 면치 못한다.영화를 아직 만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살짝 풀어보자면,랜스는 픽사 영화 에 등장하는 캐릭터다.주인공 라일리가 몰래 사랑했던 게임 속 영웅이지만,자신의 보잘것없는 공격력에 늘 주눅 들어 있다.그 순간, 까칠이가 다가와 랜스를 힘껏 북돋운다.“그럼 저주를 재능으로 승화해야지.”나는 겁쟁이다.블로그 이름도 ‘도망자의 노트’라 부를 만큼.그런데 도대체 왜일까?안정적이고 익숙한 내 직업을 내던지고,심장이 쿵쾅대는 이 낯선 길로 뛰어든 걸까?돌아보면, 나는 무모할 정도로 자주 방향을 틀었다.이공계 연구자가 꿈이었던 나는 미대에 진학했고,..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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